문턱을 높였더니 사람이 왔어요
강남 청담동의 유료 도서관 소전서림이 우리 공간에 던지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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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야만 갈 수 있는 곳
강남 청담동, 골목 뒤편이에요. 큰길에서는 보이지 않아요. 사람들이 북적이며 지나다니는 길가가 아니라 한 블록 안쪽, 그것도 주차가 마땅치 않은 자리예요. 지도를 켜고 찾아 들어가야 나오는 곳이라, 지나가다 우연히 들리기엔 알아보기도 어려워요.
그리고 이곳에 들어가려면 돈을 내야 해요. 반일권이 3시간과 5시간으로 나뉘어 있고, 그 위에 연간 회원권이 있어요. 동시 입장 인원은 55명으로 묶여 있고, 책은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 없어요. 관내 열람만 가능해요.
소전서림 이야기입니다. 흰 벽돌로 둘러싸인 책의 숲이라는 뜻을 가진 이 문학·예술 특화 유료 도서관은 2020년 청담동에 문을 열었어요. 1층은 카페와 작은 서점, 지하는 회원제 열람 공간으로 운영돼요.
상식적으로 보면 실패해야 할 조건들이 모여 있어요. 접근성은 나쁘고, 무료 공공도서관은 얼마든지 가까이 있고, 대출도 안 되는데 입장료까지 받으니까요. 개관 당시에도 도서관의 공공성을 훼손한다는 비판과, 새로운 공간 모델로 지켜보자는 시선이 엇갈렸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와요. 어쩌다 한 번 구경하러 오는 게 아니라, 동네 도서관 다니듯 익숙하게 드나들어요. 이번 출장에서 반복적으로 관찰된 장면이 바로 그거예요. 이 공간을 아주 친숙하게, 자기 자리처럼 쓰는 사람들의 모습이요.
이 장면 앞에서 질문 하나가 남았어요. 우리는 오랫동안 문턱을 낮추는 데 힘을 써왔어요. 누구나 오세요, 언제든 오세요, 부담 갖지 마세요. 무료로, 열린 마음으로, 문을 활짝. 그런데 소전서림은 정반대로 했는데도 사람이 머물러요. 그렇다면 공간을 찾아오게 하는데 문턱의 높고 낮음이 과연 중요했던 요소였을까요? 지금까지 붙들어온 전제를 한 번쯤 다시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무엇을 보았는가
현장에서 본 것들을 순서대로 적어볼게요.
SCENE 1. 시간을 잘라서 팔아요
이용권이 3시간과 5시간으로 나뉘어 있어요. 얼핏 보면 요금 계산 방식 같지만, 실제로 이 구분이 하는 일은 다른 데 있어요. 예약 확인서를 보여주면 QR을 받고, QR을 찍는 순간부터 시간이 시작돼요. 방문자는 입장하는 그 순간 "나는 오늘 여기서 세 시간을 씁니다"라고 스스로 선언하게 돼요.
무료 공간에서는 아무도 자기 시간을 이렇게 구획하지 않아요. 언제 나가도 되는 곳에서는 언제 나갈지를 정하지 않고, 정하지 않으면 깊이 들어가지 않아요.
SCENE 2. 책 옆에 읽는 법이 놓여 있어요
서가에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가 세워져 있었고, 그 옆에 종이 두 장이 나란히 놓여 있었어요.
한 장은 노란 안내지예요. 주요 판본이 무엇인지, 이 작가를 더 알고 싶으면 어떤 책으로 이어가면 되는지, 함께 읽거나 보면 좋을 소설과 영화가 무엇인지가 정리되어 있어요. 다른 한 장은 초록빛 종이에 적힌 이달의 고전 문학퀴즈 세 문항이에요. 작품 속에서 처음 눈이 먼 남자가 실명한 장소는 어디인가. 그는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를 무엇에 비유했는가.
책을 놓아둔 게 아니에요. 그 책으로 들어가는 진입로를 깔아둔 거예요.
SCENE 3. 따로 또 같이, 공간에 머무는 자리가 다양해요
칸막이 뒤쪽으로 돌아 들어가면 리클라이너 한 대가 놓인 좁은 공간이 나와요. 위에서 내려오는 곡선 조명이 그 자리 하나만 비추고, 의자에는 흰 담요가 덮여 있어요. 방문한 날, 한 사람이 그 담요를 덮고 누워 있었어요. 책은 펼쳐진 채 옆에 놓여 있었고요.
읽다가 잠든 사람을 아무도 깨우지 않는 자리가, 처음부터 설계되어 있다는 뜻이에요.
혼자서 오롯하게, 그리고 또 마주보며 함께 머무는 공간. 이 공간을 머무는 자리가 다양해요.
SCENE 4. 안내하는 사람이 시스템을 설명해요
입구에서 만난 안내자는 카페테리아 이용 방법과 회원권 종류를 설명했어요. 책을 추천하거나 공간을 자랑하지 않았어요. 이곳을 어떻게 쓰는지, 그 규칙을 먼저 알려주는 방식이었어요. 방문자는 안내를 받은 뒤 곧바로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았어요.
SCENE 5. 혼자 오지만 혼자 두지 않아요
아카데미, 북토크, 이달의 독서모임, 마스터클래스 모집이 상시로 돌아가요. 여기에 이벤트로 밤의 도서관 낭독회가 열리고, 독서리듬이라는 이름의 챌린지형 프로그램이 운영돼요. 회원제 관리와 독서 리스트 관리가 그 위에 얹혀 있고요.
Fact는 여기까지예요. 이제 이 관찰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생각해볼게요.
이 공간이 요구하는 태도
소전서림이 파는 것은 책이 아니에요.
'읽는 리듬'이에요.
시간권이 리듬의 단위를 정하고, 프로그램이 리듬의 주기를 만들고, 안내지가 리듬을 시작할 지점을 알려줘요. 독서리듬이라는 프로그램 이름이 이 공간의 정체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어요. 이곳이 제공하는 상품은 장서도 아니고 인테리어도 아니에요. 책을 읽는 삶의 리듬을, 혼자서는 만들기 어려운 그 리듬을 대신 설계해주는 거예요.
사람들이 5만 원에 가까운 돈을 내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책은 어디서든 구할 수 있지만, 세 시간 동안 책만 읽는 시간은 어디서도 잘 만들어지지 않으니까요.
좋은 책이 있는 것과, 읽게 되는 것은 달라요
노란 안내지가 오래 마음에 남았어요. 그 종이는 새로운 정보를 주지 않아요. 판본 정보와 관련 작품 목록은 검색하면 나오는 것들이에요. 그런데도 그 종이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커요.
처음 보는 책 앞에서 사람이 멈추는 이유는 대개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어디서부터 들어가야 할지 몰라서예요. 안내지는 그 막막함을 없애줘요. 여기서 시작하면 돼요, 이걸 먼저 보면 돼요, 다 읽고 나면 이쪽으로 가면 돼요. 문학퀴즈 세 문항은 더 노골적이에요. 읽고 싶게 만드는 게 아니라,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갈고리를 하나 걸어두는 거예요.
이 지점에서 우리 현장을 돌아보게 돼요. 우리에게는 콘텐츠가 없지 않아요. 교전이 있고 법문이 있고, 백 년 가까이 쌓인 기록이 있어요. 그런데 그 옆에 노란 안내지 같은 것이 놓여 있었던 적이 있나요. 처음 읽는 사람이 어디서부터 들어가면 되는지, 이 대목과 이어지는 것이 무엇인지, 다 읽고 나면 어디로 가면 되는지를 알려주는 한 장이요.
묶지 않으면서 소속되게 해요.
회원제라고 하면 보통 구속을 떠올려요. 그런데 이곳의 멤버십은 반대로 작동해요. 회원이 되면 이 공간의 주인처럼 드나들 수 있지만, 무언가를 해야 할 의무는 생기지 않아요. 모임에 나가도 되고 안 나가도 돼요. 낭독회에 참여해도 되고 구석 리클라이너에서 자도 돼요.
따로, 그러나 같이. 혼자 왔지만 혼자가 아니고, 소속되었지만 묶이지는 않아요. 이 미묘한 균형이 사람을 다시 오게 만들어요.
기존 시각이 놓치고 있는 것
여기서 이 글의 핵심에 닿아요. 문턱이 낮은 것과 머물고 싶은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일 수 있어요.
낮은 문턱은 들어오기 쉽게 만들어요. 그건 분명한 미덕이에요. 하지만 들어온 다음에 무엇을 하면 되는지가 보이지 않으면, 사람은 들어왔다가 그냥 나가요. 머무름은 다른 데서 와요. 여기서 내가 무엇을 얻어 가는지가 분명할 때, 그리고 그것을 얻는 방법까지 손에 쥐여줄 때 사람은 머물러요.
소전서림은 문턱을 높이는 대신 머물 이유를 아주 촘촘하게 설계했어요. 우리는 그동안 문턱을 낮추는 데는 애를 썼지만, 머물 이유를 설계하는 데는 얼마나 공을 들였을까요.
우리 공간에서 당장 해볼 수 있는 세 가지
큰 예산이나 공사 없이, 다음 법회부터 해볼 수 있는 것들로만 추려봤어요.
하나, 법문 옆에 진입로 한 장을 놓아보세요. 이달의 법문 한 편을 정하고, 그 옆에 A4 한 장을 둡니다. 처음 읽는 분을 위한 배경 세 줄, 함께 보면 좋을 대목, 그리고 생각해볼 질문 두세 개. 소전서림의 노란 안내지가 하던 일을 그대로 옮기는 거예요. 인쇄비 말고는 드는 게 없어요.
둘, 시간을 구획해보세요. "법회 전 30분, 명상실을 엽니다"처럼 고정된 시간대를 만들어 공지합니다. 신청은 받지 않아요.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으면 되는 구조가, 신청해야 하는 구조보다 실제로는 문턱이 낮아요. 오는 사람도 부담이 없고, 맞이하는 사람도 매번 시간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요.
셋,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자리를 하나 만들어보세요. 구석에 의자 하나, 조명 하나, 담요 하나면 충분해요. 기도하지 않아도 되고 대화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요. 교당에 처음 온 사람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게 이 자리일 수 있어요. 말을 걸지 않는 환대도 환대예요.
현장 질문 — 우리 교당에서, 처음 온 사람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30분을 머물 수 있는 자리는 어디인가요.
마무리
소전서림은 골목 뒤편에 있어요. 찾아가야만 갈 수 있는 곳이에요. 주차도 불편하고 돈도 내야 하고 책도 빌려갈 수 없어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골목을 찾아 들어가고, 세 시간을 온전히 그 안에서 보내고 나와요. 찾아갈 이유가 분명하기 때문이에요.
공간이 사람을 맞이하는 방식은 문의 높이로만 결정되지 않는 것 같아요. 그 안에서 무엇을 하면 되는지가 얼마나 선명하게 보이는가로도 결정돼요. 우리가 가진 것이 부족한 게 아니라, 그것으로 들어가는 길을 깔아두지 않았을 수 있어요.
우리 교당에 사람이 오지 않는다면, 그건 문턱이 높아서일까요. 아니면 찾아올 이유가 아직 손에 잡히지 않아서일까요.
"지금 우리 공간에서, 처음 온 사람이 세 시간을 머물 이유는 무엇인가요."
리뷰와 한줄평
코로나 전 가보았던 성북동 큐레이션 서점 "부쿠"가 떠오르네요. 차를 타고 가야 하는 거리라 여러 번 가지는 못했지만, 그곳에서 뮤지션이자 감독인 이랑의 책을 사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머물고 싶은 곳이었어요. 아마 당시 sns에서 보고 알게 되어 찾아갔 던 것 같고, 처음엔 혼자서, 그 후엔 교감교무님과 청년교도를 이끌고 갔던 기억이 있어요.
우리도 다녀온 사람이 sns에 자랑하고, 그걸보고 찾아가고, 찾아간 이는 머물고 싶은~ 그런 곳이 곳곳에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